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1세 (문단 편집) === 말년 === 잉글랜드를 평정한 윌리엄이 1086년 왕국의 토지를 조사한 결과로 작성한 문서가 《[[둠즈데이 북]]》이다. 이 《둠즈데이 북》을 전후로 잉글랜드의 귀족 체계가 크게 뒤바뀌는데, 앵글로색슨계의 작위와 봉토를 인정한 이전과 달리 앵글로색슨계 귀족 중 단 2명만이 지위를 유지하였고, 나머지 귀족 4천여 명은 토지가 몰수되었다. 그리고 몰수된 영지는 200명이 채 안 되는 노르만계 (그리고 약간의 브르타뉴인과 플랑드르인) 남작들이 하사받았다. 종교적으로도 이러한 반잉글랜드적 정책이 더 심했다. 1070년 윌리엄은 잉글랜드인 주교들을 면직시켰고 그 후로 한 명도 다시 임명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내의 상황이 안정되자 윌리엄 1세는 프랑스로 눈을 돌려 프랑스 내 영토를 확장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윌리엄 1세가 영토를 확장하자 [[프랑스 왕국]]의 국왕 [[필리프 1세]]와 프랑스 귀족들이 경계하여 충돌이 불가피해졌고, 나중에는 프랑스와도 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큰아들 로베르와 불화가 심해졌고 급기야 노르망디를 탐낸 로베르가 [[필리프 1세]]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다가 진압당하기도 했다. 1087년 7월 프랑스의 망트를 공격하다 병을 얻어, 혹은 부상을 입어 사망하였다는 다양한 설이 있고, 캉에 있는 생 테티엔 성당에 묻혔다. 그를 성당에 안장시키려고 할 때 선약자가 나타나 권리를 주장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60실링을 지불한 후에야 매장할 수 있었다. 거기다 윌리엄 1세는 말년에 말을 타지 못할 정도로 뚱뚱해져서 필리프 1세가 조롱할 정도였는데 매장이 늦어지자 부패한 시신이 부풀어 올랐다. 뚱뚱한 시신에 맞는 관이 없어서 사람들은 왕의 시신을 소가죽 안에 넣고, 꿰맨 뒤에 사이즈를 크게 맞춘 [[관(장례)|석관]]에 안장하기로 했는데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5188709&memberNo=23031360&navigationType=push|#]], 그렇잖아도 뚱뚱한 그의 시신은 부풀어올라 도저히 석관 안에 들어가지가 않았는데도 신하들이 용을 써서 결국 석관에 밀어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시신이 터져 악취가 진동한 탓에 놀란 사람들이 성당에서 빠져나오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악취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향을 피워도 없어지지 않아 나중에 성당을 환기시켜 악취가 다 빠지고 나서야 장례식을 치렀을 정도였다. 그의 무덤은 16세기 [[위그노 전쟁|종교전쟁]] 때와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약탈되어 지금은 관 속에 넓적다리뼈 하나만 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